녹취록|2016 봄 자유인문캠프 새내기 교양학교 공개강연 “붕괴와 새로운 시작”

※2016봄 자유인문캠프 새내기 교양학교의 예비모임 및 공개강연으로 진행되었던 강의 “붕괴와 새로운 시작”의 녹취록 전문을 정리하여 공개합니다.
강사 :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장)
주제 : “붕괴와 새로운 시작 : 대한민국 대학생의 주체성에 관하여
날짜 : 3월 22일(화) 저녁 7시
장소 : 중앙대학교 제2의학관(106관) 207호

안녕하십니까. 김성윤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주제는 ‘붕괴와 새로운 시작’으로, 부제는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주체성에 관하여’라고 붙였습니다만, 부제가 좀 거창하긴 하더라고요. 대한민국은 빼도 됐을 법 한데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제가 강의할 때, 원래는 에반게리온 얘기를 많이 해왔었거든요. 식상하죠? 그래서 오늘은 진격의 거인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요즘 거의 모든 대중문화 텍스트들의 공통된 특징들이 뭐냐면, 대개 붕괴된 세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다음에 거기서 홀로 떨어져있는, 소년만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겪거나 성장을 스스로 거부하거나 하는 식으로, 성장서사 내러티브가 파괴된 방식들을 보여주지요.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인기가 많은 편이고. 많은 사람들이 ‘어 이건 볼 만한 작품이다’라고 평가를 내리고 그런 식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게 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하고 묘한 닮은꼴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진격의 거인을 보면, 에렌이 주인공이죠. 에렌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살고 있죠. 친구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죠. 하지만 이야기 처음 시작과 동시에 거인이 성을 침입해 들어오면서 성벽이 깨집니다. 자기 엄마는 잡아먹히고. 그러면서 이야기가 충격적인 시작과 함께 사람들 시선을 확 잡아끄는데, 그런 과정들을 보면 이미 고립되어 있는 세계, 붕괴된 세계, 반쪼가리가 난 세계와 그 구도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거인의 침입이라고 하는 요소도 있습니다. 거인의 정체가 어떤 상징인지 굳이 따질 필욘 없을 거 같아요. 굉장히 불편하고 거대한 그런 존재가 계속 침입해 들어오고, 사람들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신체 절단은 물론 산 채로 잡아먹힐 정도로 위협적입니다. 굉장히 큰 문제죠. 그 과정에서 에렌은 자기 엄마에 대한 복수심, 이런 걸로 똘똘 뭉쳐가지고 거인을 구축하려고 하죠. 리바이 병장을 비롯한 대원들과 거인들을 구축하러 다니고. 그러면서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한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물론 아직 끝난 작품은 아니라서 섣불리 예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지하 연구실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잖아요. 어떤 식으로 끝날지는 저도 궁금해요. 조금 있으면 끝난단 얘기도 들리는데, 슬램덩크처럼 갑자기 확 끝내버리는 건 아닌지 싶기도 하고.

비밀을 알고 난 다음에 에렌이 어떤 행동을 보일까 귀추가 주목됩니다. ……. 역시 끝나지 않은 텍스트를 가지고 얘기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냥 에반게리온으로 다시 돌아갈게요. (일동 웃음)

에반게리온은 서브컬쳐 텍스트의 원형 내지는 롤모델 같은 작품으로 꼽히곤 합니다. 안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 꼭 보세요. 굉장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오늘 주제가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잖아요. 실제로 에반게리온은 이 둘을 다 보여줘요. 사실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 말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2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서베이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질문에 나온 대답입니다. 확실히 요즘 세대가 다르긴 다른 거죠. 과거 6~70년대 20대들 같은 경우엔 대한민국의 미래 하면 ‘경제성장’ 쪽으로 키워드를 맞췄고 8~90년대는 ‘민주화’ 쪽으로 답변이 나왔을 것 같은데, 최근 청년들한테 선호되는 미래 이미지는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었던 거예요. 전혀 새로운 관념입니다. 근데 이미 90년대 초중반 일본 서브컬쳐 작품에서 그런 식의 세계관이 형성돼 있었다는 건 꽤 놀랄 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에반게리온에서 얘기하는 붕괴, 새로운 시작이 지금 청년들이 얘기하는 대한민국 미래 이미지와 겹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부터 에반게리온 얘기를 계속 해왔거든요? 근데 실제로 이미지가 겹친다는 걸 확인하고 ‘야, 역시 내가 헛구라를 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반게리온 얘기가 어떻게 되냐면, 세컨드 임팩트에 의해서 이미 도쿄는 물에 잠겨버렸고 신도시 신도쿄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가 아버지 이카리 겐도를 만나러 네르프 사령기지로 가는 과정에서 외인들의 침입이 시작해요. 그게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죠. 서드 임팩트를 준비하고 사도가 침공하는 거죠. 나쁜 놈들이 침공하는데, 마치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성밖의 거인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침공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아버지를 만나고 군부대 들어가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주인공 신지가 에반게리온에 탑승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 전에 만들어진 에반게리온은 여주인공 아야나미 레이가 이미 타고 있었고, 신지는 새로 만든 에반게리온에 타야 한다는 거죠. “네가 최적화돼 있어”라고 하니까, 뭣도 모르고 몇 번 타보긴 하는데 나중엔 이게 점점 힘들어진단 말예요. 게다가 자기는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아들이기도 하거든요. 이걸 왜 타야 하는지 왜 지구를 구해야 하는지도 모를 상황인 거죠. 근데 어른들은 자꾸만 지구를 구하라고만 합니다. 내가 세계를 망가뜨린 것도 아닌데 ‘내가 세계를 왜 구해야 돼?’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결국 문제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어떤 사명의식도 없는데 에반게리온을 어떻게 할 거냐.

근데 흥미로운 게 있어요. 에반게리온에 탑승할 때 과거 로봇물 같은 경우는 조종석이 기계적으로 이뤄져 있죠. 예컨대 머리에 탄다거나. 근데 에반게리온은 복부 부분의 해치를 열고 들어가요. 게다가 배 안쪽도 우리가 아는 그냥 실내공간이 아니라, 이상한 액체로 가득 차 있는 공간입니다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워서 쿨럭거리고 그래요. 에바 덕후들은 이 공간이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한다고들 얘기하죠. 실제로 에반게리온은 신지의 어머니를 복제해서 만든 로봇이었으니까. 신지가 거기서 굉장한 심리적 안정감을 가지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중학생으로서 차츰 성장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자궁 속에서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는 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어쨌든 에바에 탑승할 이유를 알 수 없는 건 여전하고 네르프 사령관으로 있는 아버지와의 갈등도 점점 심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신지가 소명의식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어느 순간이냐면, 티비판으로 치면 6화. 극장판 서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아야나미가 탔던 에바가 사도랑 싸우다가 거의 그로기 상태에 들어요. 전기줄이 뽑히면 에바는 작동을 못하니까 아야나미 역시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거죠. 아야나미는 굉장히 묘한 캐릭터예요. 보통 아야나미를 쿨데레 캐릭터라고 하거든요. 츤데레랑은 다르죠. 츤데레는 말 그대로 틱틱 거리면서 살짝 부끄러워하는 그런 캐릭터라면, 쿨데레는 전반적으로 항상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죠. 이를테면, 작전 끝난 다음에 신지랑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사요나라’예요. 그리곤 그냥 집에 가버리고 그래요. 목소리톤도 그렇고, 실제로 사요나라라는 말은 다시 안 보겠단 뜻이잖아요. 굿바이 같은 뜻이죠. 헤어질 때 보통 ‘마타네’하고 헤어지는데 사요나라라고 하고 가버려요. 그럼 얜 대체 뭐지? 이 기지에서 내 또래는 얘밖에 없는데 얘는 항상 다시 안 볼 것처럼 나한테 인사를 해. 신지 입장에선, 여러분이 과잠을 즐겨 입는 것처럼, 나름대로 소속감도 필요하고 동질감이 필요할 수 있을 텐데, 또래 친구에게서 그런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어쨌든 레이가 그로기 상태에 있는 걸 보고 탑승을 거부하던 신지도 결국엔 ‘쟬 구해야 하겠다’ 하면서 나가서 구출을 하죠. 사도를 무찌르고 아야나미를 구출하기 위해 해치를 여는데 굉장히 뜨겁습니다. 맨손으로 열어요. 절규하듯 “아야나미!”를 계속 외치면서 기절해버린 레이를 깨우죠. 결국 레이가 서서히 눈을 뜨는데, 거기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죠. 신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거예요. 아직 친구가 아닌 상황이지만 친구가 되고 싶은 애가 죽어버리면 그곳 네르프에서 결국 외톨이가 될 텐데. 깨어난 레이를 보고 신지가 명대사를 날립니다. “사요나라 따위는 하지 말아줘.” 레이 입장에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가 울면서 갑자기 그렇게 얘기하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래서 “미안해, 이럴 땐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합니다. 패러디도 많이 되고 그랬는데, 여기서 신지가 결정적 한 마디를 하죠. “그럴 땐 그냥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라고. 그러자 레이가 살짝 옅은 미소를 보여줘요. 티비판에서 유일하게 신지한테 웃어주는 모습이죠. 그리고 그 다음부터 둘이 친구가 돼요. 참 묘한 설정이죠.

그 다음, 신지가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마지막 편으로 가면 흥미로워져요. 서드 임팩트가 가까워지고 세계가 왜 망가졌는지에 대한 비밀을 서서히 알게 된 거죠. 일본은 옴진리교 사건도 있다 보니까, 약간 신비주의적 집단들에 의해 세계가 망가졌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여기서 세계를 구원하든지 재구성하든지 해야 하는데, 소년만화 특유의 재구성 기법이 있지요. 바로 ‘리셋’시키는 거예요. 리셋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중2병적인 초능력을 발휘해서 주인공이 맘만 먹으면 세계를 확 바꿔버릴 수 있다는 설정이죠. 예컨대 몇몇 애니메이션을 보면 나쁜 놈 끝판왕을 무찌른다거나 하면 먹구름이 드리워져 무채색이었던 세계가 한꺼번에 확 바뀌고 그러잖아요. 약한 고리 딱 하나만 건드려서 세계를 확 바꿔버리는.

에반게리온은 병맛 결말로 유명합니다. 병맛의 원조랄까요. 신지가 진짜로 ‘마음먹은 대로’ 세계가 재구성돼 버리는 거예요. 어지간한 사람들 같으면 이 애니가 말이 안 된다 할 텐데, 공교롭게도 평론가부터 해서 수많은 시청자들이 에반게리온이 최고라면서 그 병맛 결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곤 하죠. 특히 마지막 2~3화는 주요 캐릭터들이 사이코드라마처럼 번갈아가면서 독백을 하는데, 얼핏 봐도 다들 정신병자란 걸 알 수 있어요(하긴 현대인 누구나 정신병 한두 가지쯤은 갖고 있겠지만요). 다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다거나 하는 식인데, 티비판의 최종결말이 뭐냐면, 신지가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서로 손을 잡아요. 동그랗게 원을 만듭니다. 강강수월래 대형으로. 대동놀이를 하는 거죠. 대동놀이를 하고, 동류를 형성을 하고 모든 지구상의 사람들, 생명체를 절멸시켜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살아남는 세상으로 세계를 리셋시켜 버리는 거예요. 굉장히 소름 돋는 결말 아닙니까? 진짜 미친 놈인거죠. (웃음) 모든 게 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이게 바로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라고 얘기했던 설문조사 결과랑 정확히 일치한다는 대목입니다. 신기하죠. 붕괴라고 하는 건 아마도 지금처럼 살기 싫단 의미와 맞닿아 있을 겁니다. 이 세계를 당장 끝내버리고 싶다는, 다들 공감하지 않으십니까? 다들 아실 것 같아요. 구구절절 얘기 안 해도. 흔히들 하는 얘기로 우린 더 나빠질 운명이잖아요, 당분간은. 출구가 잘 보이지 않고. 이미 붕괴되어 있는 세계에서. 모르겠어요. 다들 나이가 편차가 있을 텐데, 대다수 철이 들었을 즈음엔 대한민국은 이미 다 붕괴돼 있지 않았어요? IMF다 뭐다 해서. 어른들은 그러잖아요. 예전에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청년들이여 너희가 이 대한민국을 구해야 한다. 근데 젠장 내가 여기서 어떻게 구하란 거냐,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이 안 나와요.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답이란 그냥 끝내버리는 것밖에 없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데, 장강명의 표백이란 소설입니다. 거기선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적 행동이라고 하는 건 자살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해요. 오늘 다른 수업이 있어서 잠시 참고했던 게 뭐냐면, 1960년대 소설에도 비슷한 게 있어요. 서울 1964년 겨울이라거나, 오발탄 같은 소설들 있잖아요. 거기 보면 주인공들이 뭔가 다 이상한 사람들이죠. 나쁜 놈이거나 악역처럼 보이는데,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보면 색다르게 보일지도 몰라요. 무슨 이야기냐면, 이 사람들이 바로 어떻게 해서든지 다 망가뜨리려 하는 사람들이에요. 모든 관계를. 자기 아내를 팔아버리고, 그렇게 해서 돈이 생기면 하룻밤에 다 탕진시켜 버리고. 모든 관계를 망쳐버리고 자살한다거나 하는 상탠데요. 장강명의 표백 같은 경우도 할 수 있는 능동적 저항이란 대체 뭐냐, 체계나 규범에 순응하거나 그게 아니면 자살하라는 겁니다. 자살하면 지금 완벽해 보이는 체계가, 나 하나 죽음으로써 오점이 있다는 게 증명이 되지 않겠냐. 이게 체계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물론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자살하거나 하면 아무도 안 알아주죠. 우린 아무도 모르는 듣보잡들이니까. 그러니까 대신 그 소설에선 최대한 유명해지고 난 다음에, 삼성에 입사하고 난 다음에 자살을 하자, 그렇게 돼요. 우린 그러기도 힘들겠죠?

이런 식으로 붕괴에 관한 각종 내러티브가 우리 주변을 지배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럼 새로운 시작은 어떻게 할 거냐. 아까 그 서베이에서도 세부적으로 새로운 시작에 대해 물어봤었죠.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 뭐냐면요. 오늘날 청년들이 대안적인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뭘로 그리냐면, 공동체의 복원이에요. 아까 에반게리온 결말하고 비슷하죠. 근린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심적 위안 같은 걸 찾고자 하는 경우. 그 외의 세계는 절멸시켜 버리고. 모르겠어요. 실제로 요즘 보면 각종 공동체주의 넘쳐나지 않습니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경제, 이런 것 되게 많잖아요. 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거기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런 컨셉에 관해서 오늘 이야기는, 왜 이렇게 붕괴 직전의 세계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라 얘기했을 때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냐, 대략 이런 얘기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서론이 좀 길었죠?

일단 청년에 관한 얘길 했는데, 오늘 이야기 주제는 대학생이잖아요. 약간 무리수가 있지만 이걸 감내하고, 청년은 거의 대학생으로 생각하고 이야길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실제로 학령기에 있는 80%의 청년들이 대학을 거쳐 가고 있으니, 그렇게 봐도 큰 무리는 아니겠죠. 물론 그 이외의 20% 청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면, 일부는 굉장히 힘든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일부는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여러 방향이 있겠지만, 일단은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이 둘을 동일시하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저는 이렇게 이해해요. 대략 1990년대 초반쯤이라고 보는데, 1997년하고 1990년대 초반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특히 청년세대, 20대들한텐. 아시다시피 1997년엔 IMF 구제금융이 있었고, 90년대 초반엔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이 있었죠. 이 두 사건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냐면, 90년대 초반 사건은 그 당시 20대들이 갖고 있었던 좌표라고 할 만한 게 사라졌던 시점이거든요. 민주주의 얘기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90년대 초반쯤 87체제 지나고, 반독재 투쟁 끝나고, 급진적 요구들이 튀어나오거든요. 특히 강경대 정국은 국가폭력에 대한 급진적 저항이 일고 있던 시점이어서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런 게 있다가, 유서대필조작 사건이니 뭐니 하면서 정국이 반전되고,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해 현실사회주의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상 하나가 사라져버린 상황이 된 거죠.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이런 것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간에, 중요한 선택지 하나가 사라진 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20대 청년들이 좌표를 상실했다는 건 굉장한 불안감을 초래하는 문제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다 성장이 끝난 시기이기도 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보면 계속 성장해야 할 시기인데, 성장이라 하는 건 앞으로 나가건 뒤로 나가건 움직인다는 의미잖아요. 근데 어디로 움직이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거죠.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남는 게 뭘까?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 된 거예요. 1997년에 IMF 구제금융 있었을 때는 심지어 마지막 한 줌의 기대감을 품게 했던 경제적 안정, 경제성장 이런 것도 불가능하다는 게 증명돼버린 셈인 거죠. 정치적 좌표와 경제적 좌표가 상실돼버린 세계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퉁 쳐서 얘기하면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좌표의 상실이라 얘기했는데, 다른 한편으론 표적도 사라졌어요. 표적이 사라졌다는 건 무슨 얘기냐면, 90년대를 거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는데, DJ 정부가 들어서면서 자기 딴엔 박정희 정권의 어떤 통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조치 중 하나가 국민교육 패러다임을 폐지시키는 거였거든요. 예전만 해도 국민체조 이런 거 하고. 요즘도 하죠? 안 해요? 요즘은 무슨 체조해요? (새천년건강체조.) 그게 DJ 정부 때 도입이 됐으니까. 왜냐하면 국민체조는 기본적으로 일제 내지는 신군부의 잔재라는 것도 있지만은, 각종 국민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들이 실제로 실행단계로 옮겨지기 시작한 겁니다. 국민교육헌장은 YS 때, 암기교육이 끝나버려요. 국민교육헌장이 모두 393글자인데 군부정권 때만 해도 이걸 다 외웠거든요. 제가 중2때까지만 해도 다 외웠어요. 한 글자라도 틀리면 글자 틀린 거 한 자 당 한 대씩 얻어 터졌으니까.

근데, 이게 말입니다. 국민교육헌장 내용 보면 ‘반공’ 두 글자 빼고 보면 사실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에요. 안으론 민족중흥 그런 거 하고, 굉장히 좋은 내용이잖아요. 밖으론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때다. 심지언 코스모폴리탄적인 내용까지! 나중에 한번 보세요. 그거 문장 기초한 사람이 그 당시 서울대 철학과, 한국 현대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박종웅 교수라는 사람이기도 해요. 어쨌거나 국민교육 패러다임이 끝나버리기 시작하면서 이게 어느 순간 민족주의라는 게 형해화돼버리는 단계가 도래합니다. 수업시간에도 가끔 그런 얘길 하는데, 우리가 단일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은 거의 없죠? 굉장히 놀라운 변화예요. 제가 시간강사 초짜 시절만 해도 우리가 단일민족입니까, 하면 거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손들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렇게 물어보면, 모르겠어요, 내 성향을 알아서 그런지, 다들 가만히 있어요. 근데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유전학적으로도 역사학적으로도 우리가 단일민족이 아니란 건 이미 여실히 증명된 상황이잖아요.

다른 한편으론 오랫동안 가상의 적 노릇을 해왔던 일본이 어느새 우리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DJ 때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돼요. 러브레터, 우나기, 하나비, 이런 영화가 국내 개봉관에서 개봉작으로 걸리기 시작하고. 원래 그런 거 못 들어왔거든요. 요즘은 TV에서도 일본영화 가끔 틀어주잖아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금기시되는 행위 중 하나였는데 그게 어느 순간 들어오고. 북한은 일찌감치 나가떨어졌죠. 반공주의도 명맥이 끊긴 거죠. 현실 속에서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가상의 적으로 내세울 세력도 없고. 게다가 내셔널리즘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우리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자리란 것도 유명무실해졌어요.

그러니까 안으로 밖으로 내가 어디서 누굴 미워해야 할지가 사라져버린 상태가 돼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 게 뭐냐면, 프로이트 식으로 얘기하자면, 대개 새로운 문명의 모티브는 형제들끼리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아버지가 독점하고 있는 인적 물적 성적 자원을 형제들끼리 나눠먹는 거거든요. 아버지의 시신을 나눠먹으면서. 그러면서 자식 세대가 성장하고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구축돼요. 그래서 모든 위대한 이야기에는 부친살해 모티브가 있다고 프로이트가 얘기하죠. 근데 이 얘기를 지금 시기에 도입해서 보면, 우린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잖아요. 근데 분노는 끓어오르고. 예전엔 이 분노를 풀 대상이 있었거든요. 일본이건 북한이건 빨갱이건. 근데 이제 빨갱이? 어, 우린 다 빨갱이잖아요, 비더레즈, 대한민국 만세. (웃음) 아니면 북한? 너무 찌질해서 상대가 안 되고. 일본? 가깝지만 멀지만 또 가까운 나라고. 외부 가상의 적이 사라져버린 상태가 돼요. 누구나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가상의 적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이중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 한편으론 좌표가 상실되고, 한편으론 표적이 상실되는 거예요. 농담처럼 얘기하자면, 그 누굽니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이 사람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우리나라에 번역됐을 때, 그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 애매한 상황. 앞을 알 수 없고, 게다가 화를 풀 수도 없는 꽉 막힌 상황인 거죠.

표적의 상실과 관련한 모티브가 적용된 대표적 사례가 대중문화에서는 완득이 같은 영화예요. 완득이 보면, 항상 열받아 있는 상태잖아요. 화가 나니까 화를 풀어야 하는데 풀 데가 없어요. 자기 괴롭히는 선생님 있잖아요. 처음엔 동주 선생 죽여주세요, 하나님 죽여주세요 그러는데, 알고 보니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교사가 없어요. 자기 생물학적 아버지는 오히려 장애를 갖고 있어서 자기가 돌봐야 할 사람이에요. 심지어 국가라고 하는 아버지는 마이너리티 그룹을 돌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국가 대신에 내가 이 사람들을 챙겨야해, 국가가 무능력하니까요. 국가가 전지전능하면 국가권력을 상대로 투쟁이라도 할 텐데 말이죠. 마치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처럼. 그러니까 7~80년대 청소년들은 표적이 명확했거든요. 생물학적 아버지한테 맨날 얻어터져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무술 연마하고 그러잖아요. 학교엔 교사라는 아버지가 있고, 길거리엔 애국가 나와서 좋아하는 여자애 못 따라가게 하는 국가라는 아버지도 있고. 그래서 말죽거리 잔혹사 맨 마지막 장면 그거잖아요. 쌍절곤 가지고 교실 창문 다 깨면서 “씨발, 대한민국 학교 다 조까라 그래” 하면서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게 분노의 표적이 있다는 걸 보여주거든요. 근데 완득이 결말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랑 대동놀이 하면서 끝나요.

이게 묘한 상황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좌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랑 손잡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게 합니다. 표적은 정말 없는 건가, 이런 생각도 들고. 무엇도 확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까 이미 붕괴된 세계인 거죠. 더 나빠진 세계인 거고. 한 말씀 더 덧붙이면, 좌표의 상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중적인, 중의적인 의미에서 성장과 우울이라고 하는 걸 계속 자극하죠. 성장을 거부하거나 혹은 성장이 가로막히는 상황. 경제학적 성장이라거나, 사회학적 성장이라거나. 경제성장은 어렵고, 또 ‘키덜트’ 같은 얘기하면서 다들 성장을 거부하고. 그러다보니 좌표가 없으니 자기 자신이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외부의 자리가 정해져야 자기 자리도 정해질 텐데, 자기 자리가 불분명하니까 자꾸 우울해지는. 디프레션이라고 하잖아요. 우울과 공황. 공황 직전의 상황.

표적의 상실과 관련해서, 분노 에너지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서 공교롭게도 우린 늘 항상 화가 난 상태잖아요. 화날 준비가 돼있고. 화가 날 수밖에 없고. 계속 화가 쌓여요. 근데 표적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각자 알아서 분노의 표적을 찾아야죠. 그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이 분노에너지를 어떡하겠어요. 이걸 긍정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절대 불가능하잖아요. 저도 가끔 ‘딥빡침’할 때가 있어요. 이건 풀어야 해요. 벽을 때리건 뭐건. 근데 풀 데가 없잖아요. 앞에 뭘 만들어야 해요. 가상의 적이 없으면 우리가 정상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필요악으로 어떤 관행들이 생겨나냐면, 혐오 같은 것, 대상을 가리지 않는 혐오. 혐오발화 이런 것들 있잖아요. 이런 게 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내 일자리 뺏는 놈들이 있는 거 같아. 여성상위시대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다들 자기만의 개똥철학이 있으니까. 치안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 조선족. 지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받고 있는 것 같아, 동성애자. 그죠? 우리 내부에서 계속 선을 그으면서 적들을 만들어내는 거죠.

좌표의 상실과 표적의 상실이라 하는 문제는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이게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하고 있습니다. 대략 어떤 생각인지 아시겠죠?

아까 말씀드렸던 친구가 되는 것 있잖아요. 근린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게, 이게 참 묘한 문제죠. 왜냐하면 우리는, 저땐 그랬어요. 공동체가 항상 문제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지니는 게 굉장한 저항이었던 거죠. 요즘 혼밥하고 아싸, 이러면 굉장히 문제 있는 것처럼 그러잖아요. 우리 때 같았으면 혼밥한다 그러면, 와 정말 대단하다! 역시 저항할 줄 알아!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가, 이 시민대중적 차원에서 개인주의가 자리잡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되다 보니 우리에겐 그 자체가 굉장히 큰 저항이었던 거예요. 공동체적 습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굉장히 ‘있어’ 보이고. 요즘엔 정반대죠. 분위기상. 예전엔 남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한단 말예요. 그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그런 책도 있었어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만 있다”, 뭐 그런 비슷한 제목의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요즘엔 상황이 바뀌어서 남들이 날 보지 않으면 불안해하죠. 묘한 반전 상황인데, 그게 뭐냐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셔널리즘 붕괴 이후에 새로운 대체 이념이 없는 상황과 관계있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내셔널리즘의 맥락은 국가폭력이랑 이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늘 문제적이었죠.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순 없었지만,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냈던 특정한 효과가 있었어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어찌 됐건 민족이란 이름으로, 혹은 국민이란 이름으로 호명된 사람들끼리 동류의식을 형성하게 해줬던 거죠. 우리 같은 민족 구성원이구나, 대한민국 국민이구나. 그런 동질감 같은 걸 형성해주는 메커니즘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내셔널리즘을 통해가지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국민교육 이런 걸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를 만들어내며 국가주의가 작동하다 보니까, 아무도 의도한 게 아닌데, 공적인 것에 관한 맥락들이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 윤리로 자리잡게 되는 거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린 민족의 빛나는 얼을 되살려 민족중흥에 기여해야 하고. 이건 굉장히 공적인 내용이잖아요. 다른 한편으론 인류의 공영.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국가폭력 문제가 심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자기 자신을 상상할 때 스스로를 공적인 존재로 상상했던 거예요. 대표적 사례가 486 세대들이잖아요. 자기 자신을 공적인 존재로 상상하고, 그러다보니까 공적 책무감을 가지고 있고. 그와 관련해서 여러 사회적 발언들, 특히 공공성과 관련한 발언들을 하는 효과가 있던 거죠.

근데 내셔널리즘이 붕괴된 다음에 이 두 가지가 허물어집니다. 하나는 사람들 간의 동류의식이 해체돼버리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분위기 반전이 일어나요. 사람들이 날 안 보는 것 같아, 불안해지고. 혼자 살아야 할 것 같아. 독립은 하고 싶은데 고립은 싫어, 책제목 있잖습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공적인 것을 지배적인 윤리로 승인하고 있지 않죠. 사적인 경쟁 이데올로기 같은 것만 넘쳐나잖아요. 티코 탈래 BMW 탈래, 급훈이 그딴 식이에요. 예전엔 급훈이 뭐였는지 아세요? 근면 자조 협동.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공적인 연결고리 구실을 했던 것들이, 사회학적 입장 혹은 뒤르켐주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규범이 부재한 상황에 빠지는 거죠. 아노미 상황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까 1960년대 상황이랑 지금이랑 비슷하다고 한 게 뭐냐면, 통치이념이 부재한 상황이거든요. 다들 가치관 혼란에 빠져가지고, 내적 갈등, 내면으로 침잠하기 시작하고, 이런 시기였는데. 지금이 그런 맥락들하고 이어지는 게 있는 거죠. 사람들이 공동체적 결속을 원하는 게 괜한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어쨌든 우린 공동체 없인 살 수 없으니까.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제 식으로 얘기하면, 불편부당한 말인데, 언제나 공동체가 문젠데 공동체 없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게 또 다른 문제란 말이에요. 그러다보니까 다른 식으로 공동체를 구성해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적인 관계에서 이걸 만들어내는 거예요. 수평적 연대를 통해서. 횡적 연대를 통해서. 자기 주변 친구들끼리. 우리끼리 협동조합 만들자, 우리끼리 공정무역하자, 우리끼리 사회적 책임을 다 하자, 우리끼리 마을 만들자, 도시재생하자.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사실은. 다들 이카리 신지가 되는 거죠, ‘중2병’에 빠져있는 거죠, 병맛 결론에 이르는 거예요, 어느 순간. 지금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런 상황인 거고.

물론 이 자체가 나쁜 건 아녜요. 사적인 관계, 사교적인 관계의 회복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 우리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도. 근데 그것만으론 안 되는 게 있으니까 항상 문제가 발생한단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저는 20대 청년들이 ‘붕괴와 새로운 시작’ 그랬을 때, 맨 처음엔 굉장히 짱이다, 그랬어요. 다들 이 세계를 파괴시키려고 하는구나. 새로운 시작이 뭐가 될 진 모르겠지만. 다들 뒤집어엎은 다음에 자율적 리듬에 모든 걸 맡기려 하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 뭔가 하려는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더라고요. 그게 공동체주의로 가는 거죠, 수평적 연대.

문제는 뭐냐, 거기에 항상 빠져있는 설정이 있어요. 빠져있는 프레임이 뭐냐면, 수직적 적대가 빠져있어요. 계급사회에서 적대라고 하는 문제는 해소불가능한 문제란 말예요, 그쵸? 그렇잖아요. 요즘 초등학생들 장래희망 1순위, 뉴스 보셨어요? (연예인?) 아니에요. 밀려났어요. (공무원?) 아녜요. 건물주. 요즘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우리의 장래희망은 어느 순간 건물주가 된 거예요. 이게 뭐냐면, 계급사회에서 신분이동이건 사회이동이건 하고 나면, 그 위치에 가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있어서 적대적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집 집주인도 마찬가지에요. 마음씨 좋은 집주인 할아버지도 자기 아들내미가 사업자금 필요하다 하니까 보증금을 두 배로 올려달라고 하더라구요. 돈 앞에 장사 없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그래서 뭐냐면, 계급구조에서 상층 계급의 사람들은, 특히 국가에 빌붙어 움직이는 상층 지배 엘리트 계급들은 항상 수직적 적대를 행사해요. 지금 우리가 관찰하고 있죠. 우리가 별다른 목소리를 안 내니까. 걔네들은 계속 적대를 하고 있죠. 근데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꿈꿀 때, 이 수직적 적대에 대한 설정이 없다는 게 뭐냐면, 거기에 맞받아쳐서 수직적 적대라는 설정을 가지면서 수평적 연대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쵸? 제가 알기로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얘기하고 동시에 꼬뮨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게, 수직적 적대와 수평적 연대라고 하는 설정을 동시에 갖고 갔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라고 보거든요.

위로부터 적대가 자행되고 있는데, 우리도 계급적대를 한다는 게, 일대일 맞다이 까면 당연히 우리가 져요. 모든 자원은 걔네가 독점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치밀하게 고민하고 더 치밀하게 복잡하게 계산하고 이래도 될까 말까 하는 싸움인데, 아예 거기에 대한 생각들을 안 하고, 외부 세계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상상해버린 채 우리끼리 손잡고 끝내겠다, 이건 병맛이라는 얘기죠. 툭 까놓고 얘기하면요. 그래서 지금처럼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하다보면.

사실 대한민국은 어휴, 더욱 붕괴할 게 아직 많이 남아있죠. 그럭저럭 살 만한 나라이긴 하잖아요. 그래도 아직 우리는. (웃음) 더 나빠질 거란 전망은 그런 데서 나오지 않나 싶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저도 잘 모릅니다. 잘 알면 여기에 있겠습니까. 벌써 정치를 하거나 그러고 있겠죠. 근데 정치하고 나면 또 변하는 거 아냐? 이방원처럼 킬방원 되고.

주제가 주제니까 대학생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생 얘기랑 대학 얘기만 간단하게 해볼게요. 요즘 상황은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자캠 기획단 분들이 잘 아실 것 같은데. 예컨대 취업전쟁이 사실은 심각한 문제잖아요. 가끔 보면 불편부당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많은 경우 청년담론이나 이런 걸 보면, 486 세대에 대한 세대적 적대감이 굉장히 심한 것 같아요. 자기 부모 세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부모를 살해해 버리고 부모 시신을 나눠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요즘 드는 생각은, 우리 연구소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묘하게 그 사이에서 90년대 학번들에 대해선 아무도 말을 안 하데요. 누구 말하는 사람 들어본 적 있어요? 거의 없죠? 저는 90년대 학번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속했던. 세대론을 신봉하는 입장은 아닌데 굳이 세대에 대한 얘기를 하면 90년대 학번들이 오히려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항운동을 하고 자기들끼리 폼잡으면서 뭔가 했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하는데, 성공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X세대 신세대로서 소비주체가 되는 건 성공했죠. 그거 말곤 성공한 게 없어요. 넓게 보면 80년대 후반까지 포함된다 치면, 87체제가 등장을 하고. 학생운동 막으려고 전두환 집권 초기 때 대학교 입학정원을 늘리기 시작했거든요? 79년 당시에 4년제 대학생 전체 재학생 숫자가 4만9천명밖에 안 돼요. 지금 중앙대는 안성 합쳐서 1만 가까이 되잖아요. 예전에 대학생이라고 하면 초-엘리트인 거죠. 어느 대학 다니건 항상 배지 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지식인이라고 우러러보고 그랬겠죠. 근데 요즘은 아무도 안 쳐주죠. (웃음)

그 당시 입학정원을 늘린 게 목적이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뭐냐면 고급인력 확충하려 했던 거예요.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다 보니까 산업구조 개편해야겠단 생각에서 대학 입학정원 늘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 맥락은 뭐냐면, 전두환이 그러는 거죠. 이렇게 입학정원 늘리면 애들 데모만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청와대 경제수석 하던 사람이 뭐라 그러냐면, 각하 염려 마십시오. 대학 입학정원 늘리면 사회적 불만이 많이 해결될 겁니다, 그랬어죠. 한국처럼 교육열 심한 나라 없으니까. 그래서 했는데 정말 대학생 숫자 많아져가지고 데모 때문에 군부독재는 힘을 잃죠. 하지만 그 당시 신군부에서 노렸던 효과가 90년대에 나타나요. 소위 말하는 오렌지족이 등장하고. 소비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호명되는 대학생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가 90년대 초반이거든요. 게다가 YS 정권 시기에는 노동유연화를 시작했고,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전초단계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요. 왜냐하면 시장질서 자체가 투명해야 외국자본을 유치하건 말건 그럴 거 아녜요. 금융실명제 다들 잘한 일이라고 하잖아요. 그 당시엔 쌍수 들고 환영했어요. YS가 개혁정책 하고 그럴 때 국정지지도가 90%를 넘어섰으니까. 미친 거죠. 김일성 버금가는 수준으로. (웃음)

근데 금융화가 되리란 예측을 못했던 거예요. 해외로 공장이전하고 이런 정책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국내에서 정리해고나 노동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거라곤 제대로 예측도 못하고 대비도 못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 공세가 87년 때부터 해서 YS, IMF 시기를 5년 단위로 거쳐서 빵빵빵 터졌는데 거기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이야깁니다. 특히 97년 98년 넘어갈 때 노동법 개악될 땐 다들 지금 국민경제가 위기라고, 다들 일자리 나누자고 그랬어요. 나눴더니 어떻게 됐어요? 다 비정규직화 돼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뭐냐면, 저항한답시고 움직였던 세대들, 혹은 그 사람들이 뒷문으론 슬그머니 신자유주의화를 부추겼던 세대인 거죠. 묘하게. 자기들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심지어 그 당시엔 신자유주의란 말도 없었어요. 그 말이 막 통용되기 시작한 게 97년 그쯤이었으니까. 정세판단에 실패한 거죠. 90년대 학번은 그래놓고는 IMF 끝나자마자 얼른 취업해버리고, 그러고 난 다음에 진입장벽이 딱 막혀버렸잖아요. 그리고 여러분 차례가 돼요.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이렇게 되는 거죠. (웃음)

한편으론 권력비판에도 실패했고 한편으론 시장비판에도 실패했고.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거치지 않는다면 계속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지금 상황은 취업하기가 어렵잖아요. 취업하려고 스펙을 쌓고. 스펙 쌓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스펙 안 쌓을 수가 없어요. 스펙 쌓고, 하면 취업은 되나? 스펙 쌓아도 이젠 취업이 안 되잖아요. 취업을 해도 적정임금을 받나? 다 후려치잖아요. 비정규직, 인턴, 열정페이. 뭘 해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는데. 이렇게 된 게 사실은 구조적 문제하고도 관련 있다고 봐요. YS 때 대학 입학정원이 또 한 번 뻥튀기가 돼요. 대학 자율화 정책 하면서. 그러면서 수많은 종합대학이 막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원랜 특정분야만 잘 나가던 대학들이 종합대학으로 거대하게 몸집을 키우기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한국사회가 어떻게 되냐면, 처음엔 고급인력이 필요해서 대학 입학정원을 늘렸는데, 한국의 학력구조라는 건 큐빅 다이아몬드 같은 구조가 되잖아요. 대학생 숫자가 기형적으로 많은. 그에 비해서 고용구조라고 하는 건, 여전히 한국에서 부가가치 생산은 제조업 분야에서 적어도 30% 이상은 만들어낸다고 하니까, 일자리 구조, 고용구조는 피라미드형이죠. 학력구조는 큐빅 다이아몬드 형태고. (칠판 판서) 구조적으로 이렇게 생긴 거죠. 여기서 잉여가 발생합니다. (고학력층의 잉여 인간) 항상적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들. (제조업 분야의 잉여 일자리) 일자리는 어쩔 수 없다 보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여기를 채우고 있고. 그런 구조란 말예요, 한국은. 그래서 한국은 외국인 혐오가 다른 나라하고 좀 다르긴 해요. 곁다리 얘기긴 하지만. 일자리 문제 때문에 혐오가 일어나지 않아요. 오히려 범죄 때문에, 범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런 것만 있죠. 기묘한 나라예요.

아무튼 이 지경이 된 상황에 대해서 저도 같은 90년대 학번으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저도 몰랐으니까. 아냐, 오히려 나는 그랬어요. 이게 무용담이 아니라, 완전 중2병 상태라서. 친구들이랑 우리 취업거부 운동하자고. 완전 또라이였죠. (웃음)

다른 한편 대학은 계속 기업화하는 방식으로 갑니다. 이건 다들 뭐 아시니까. 중대가 대표적인 대학이고요. 이것도 사실은 90년대부터 시작한 거거든요. YS 때. 대학경영이란 패러다임이 처음 등장해요. 대교협이라고 각 대학 총장들 모인 단체 있잖아요. 거기서 대학운영, 대학경영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요즘 상황이 됐는데. 그러다보니까 대학이라고 하는 공간이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도 실감하는지 모르겠어요. 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이것도 참 확정적으로 얘기하긴 곤란한데, 어느 순간 보면 대학이라는 의미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또 너무 의미부여를 안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저도 판단이 왔다갔다 해요. 단적으로 이제 대학가요제 안 하잖아요. 그죠? 대학생으로서 대학가요제가 없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근데 여전히 신인가수는 생기죠. 대학가요제의 자리를 슈스케나 케이팝스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까요. 이제 굳이 대학생 아니어도 가수가 될 수 있어요. 대학이라는 공간이 점점 의미 없어진다는 겁니다. 대학생에게 물어봐요. 여러분 지식인입니까? 십중팔구는 아니라 그래요. 그럼 뭐냐 그러면, 대중에 가깝다 그러고. 그럼 대중입니까? 그럼 또 아니라 그래요. 그럼 뭐라 그래요? 잉여입니다! (웃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대학을 너무 과잉의미화하는 경향도 나타납니다. 약간 분열증적인 상황인 것 같아요. 특히 학벌 이런 게 얽혀 있을 때. 물론 과잠 같은 경우는 소속감이나 동질감 형성하기 위해서 입는 게 분명한 사실일 테지만. 어느 순간엔가는 학벌에 대한 표식이 되면서 요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묘한 문제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잖아요. 위화감을 조장한다거나. 중대 과잠을 입고 삼각지에서 버스를 타고 상도동으로 향한다고 쳐보세요. 그 중간에 숭실대 학생이 탑니다. 숭실대 과잠 입고. 좀 이따 용산역에서 서울대 과잠 입은 학생이 탑니다. 그때 그 묘한 느낌. 어떻게 생각해보면 대학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의미화하고 있는데, 이 방향이 약간 좀 생경한 거죠. 제가 아까 이야기했던 식으로 하자면, 대학이라는 공간을 공적인 것으로, 공공성하고 맞물려서 상상하는 관행이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대학이라는 공간은 자기 자신의 상징 자본으로 여길 때에만 의미가 있어요. 그 외에 대학이라는 공간은 그냥 노동자로서 취업교육 받는 곳. 아니면 중간관리자 양성소로서만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이게 오늘날의 현실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대학생의 주체성. 저는 이런 건 나이 많은 분들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저는 아직 성장 중이라서 주체성 이런 거 하면서, 여러분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부끄러워요. 그냥 이론적으로 제가 최근 관심 있는 부분만 얘기하면, 서브컬쳐 얘기도 나왔지만, 지금 국면이 동물화 국면이라고 하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의 주체성이 동물화된다, 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일정 맞는 말 같기도 해요. 소비 수준이 점점 심미화되고 타인에 대해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게 단적인 예입니다. 심지어 요즘은 대중이라고 하는 존재도 의미가 없어지고 있잖아요. 여러분 대중문화 즐깁니까? 하면 자신 있게 즐긴다고 말하는 사람 거의 없을걸요. 자기가 좋아하는 문화가 대중문화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고, 자기 자신이 모든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자기가 알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알아요. 자기 마음속에 덕후 하나쯤은 키우고 있잖아요. 덕후감 하나쯤은 다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책 홍보하는 건 아닙니다만. (웃음) 어느 경우엔 프로그레시브 락 덕후도 있고. 공부 덕후도 있을 거고. (웃음) 각종 그런. 소비수준은 점점 심미화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면, 정치적인 것, 정치의식이라고 하는 그 부분이 점점 백지상태가 돼버리는 그런 현상을 동물화라고 표현하는 거죠. 동물화의 추세는 갈수록 심해지지 않겠어요, 솔직히? 이거 막을 수 있다고 봅니까? 제가 너무 염세적인가요? (웃음) 저는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힘들 거 같은데. 세월호 사건 때도 보세요. 벌써 다들 피로감 느껴서, 이번에 연구소에서 세월호 관련된 월례발표회를 했는데 참가 신청자가 7명밖에 안 돼요. 다들 관심이 없는 거예요. 냄비근성 때문에 그런가? 준비를 잘못해서 그런가? 그런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죠.

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의 감각은 계속 고도화됩니다. 생물학적 감각은. 마치 먹방 유행하듯이. 생물학적 감각은 점점 고도화되는데 그에 반해서 정치학적 감각은 점점 퇴행합니다. 이게 하나의 추세성을 보이고 있는데, 과연 단절될 수 있을까. 미래는 예측불가능한 부분이니까,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동물화라고 하는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가급적 열린 결말로 가야겠죠? 가능성의 조건을 찾아야 할 테니까. 간다고 하면 첫 번째로 생각하는 건, 이거 유치원 수준인데, 다르게 살아야죠. (웃음)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게 뭐냐면, 공공성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걸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하는데.

대학에서도 마찬가지고 실제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공적인 것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이때 공적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아왔던 집합적인 것으로서 공적인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렇다고 국가로 환원되는 것도 아녜요. 공적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뭐 민중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어떤 규범, 이렇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저는. 요즘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공통성 공통적인 것 이런 것 있잖아요. 그거랑은 생각이 좀 다른데. 약간 칸트의 의미에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흥미로운 구분법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보통 사적인 것 공적인 것 그러면, 사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공적인 것은 집합적인 것이라고 많이 생각하잖아요? 이런 식의 구분법은 대략 19세기쯤부터 만들어진 거래요.

그래서 대략 17~18세기 때만 해도 칸트식 어법을 보면,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하거든요. 이때 사적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자기한테 주어져있는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이거에 그대로 순응하는 거예요. 이게 사적인 거예요. 내면에 집중하는 것. 공적인 것은 뭐냐면, 자기한테 주어진 아이덴티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공적인 거예요. 19세기에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개념체계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는데, 사실 그 전의 원래 개념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있지 않나 싶어요. 대학의 공공성이라 하면 모든 사람들이 같이 참여해서 거버넌스를 꾸리는 것? 뭐 이런 것도 공공성이긴 하겠지만, 같이 거버넌스해서 뭘 할거냐, 대학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이냐, 이게 중요하단 거죠. 어떻게 움직이느냐의 문제니까. 이런 말씀을 한번 드려보고 싶고….

동물화와 반대되는 정치적 주체화의 또 다른 길이라고 한다면, 한편으로는 동물화에 집중하는 방식도 있어요, 역설적으로. 동물화의 조건으로 우리를 계속 압박하는 사회적 압력 같은 게 분명히 존재할 텐데, 이것과 담 쌓고 우린 공적인 걸 회복하겠어, 라는 것도 중요한 방향성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화의 외적 객관적 조건이라고 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 그 안에 들어가서 내파시켜내는 방식들도 있지 않을까 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저는 아직 공부가 미약해서 어떤 식의 판단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서 내파시킨다고 하는 건, 예컨대 뭐랄까 타고 넘어간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 있는 조건을 타고 넘어 간다.

저는 대중문화 전공을 하지만, 굉장히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 편이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문제가 저한텐 굉장히 중요한 문젠데.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저항할 거냐는 질문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경우는 이데올로기 바깥으로 벗어나는 게 저항하는 길이라고 한동안 생각들 해오고 그랬는데, 과연 이데올로기의 바깥이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때때로 이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게요, 참 모순적인 게, 문자 그대로 모순을 가지고 있어요. 그 자신은 완벽한 체계인 것처럼 포장을 하지만 그 안의 내적 모순을 담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가장 충실했을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 나타난다고도 해요. 무슨 말이냐면, 그런 게 있을 텐데, 삼강오륜 같은 게 있다고 봐요. 이게 지배적 이데올로기라 하면, 삼강오륜에 충실했을 때 그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효과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거죠. 예컨대 충효 같은 경우에 충과 효가 충돌하는 상황들이 발생할 수도 있잖아요. 두 가지에 다 충실하려다 보면 체계의 모순 같은 게 노출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파의 방식인 거죠.

그게 앞으로 어떤 전술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요. 동물화랑 관련해서, 이게 원래 코제브나 데리다 얘기이긴 하지만, 대중적으로 제법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 같은 사람 있잖아요. 이 사람은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면, 예컨대 트위터 같은 데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글을 쓰고 하잖아요. 내파를 시키는 전략으로서, 거기서 저항의 가능성,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기도 하는데, 그건 좀 오버인 것 같고…. 구체적으론 저도 잘 모르겠는데, 방향성 정도는 그런 식으로들 나타나는 거 같아요. 다른 길을 상상하거나, 아니면 내적 모순을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럴 때 대학생들의 주체성이라고 하는 게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거죠. 동물화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정치적 주체성이라고 하는 속성이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동물화에 충실했을 때. 동물화는 주체화가 아닌가요? 주체화의 일부일 수 있잖아요. 거기서 새로운 주체성이란 게, 이전 세대에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주체성이란 게 출현할 수도 있겠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최근엔 연구소 사람들과 같이 요즘의 대중문화 환경, 서브컬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려는 작업들을 시작하고 있는데, 어떤 결론에 이를지는…. 실패할 수도 있죠. 실패하게 되면 나중에 자유인문캠프 네이버 카페에 올려둘게요. 실패했습니다, 그 길이 아닌 걸로. (웃음) 가급적이면 왜,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서술하도록 할게요. 이렇게 하면 실패합니다, 타산지석으로.

여러모로 부족한 얘기였어요.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좌표의 상실과 표적의 상실이라고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었고. 거기서 오늘날 우리가 찾고 있는 새로운 시작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단계로 이어가고 있는데, 공동체에 대한 집합적 희구, 즉 집단화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게 가만히 살펴보면 수직적 적대라고 하는 요소를 구조적으로 삭제하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나눠봤고요. 그거랑, 제가 나름대로 자꾸 연결시켜 보려 했는데 잘 안 돼서 힘들긴 했는데, 대학생 얘기를 하자면, 공적인 것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볼 거냐, 그 다음에 동물화라는 주체적 조건까지. 동물화하는 주체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길은, 너무나 뻔한 얘기고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한 방식이긴 하지만, 전략적 방향성은 내파와 외파. 사실 두 개밖에 없는 거 아닌가? (웃음) 아주 뻔한 훈장님 같은 말씀으로 오늘 얘기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Q&A

Q. 말씀 중에 ‘새로운 시작’으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구 같은 게 있다고 보시는 거잖아요. 최근에 탈조선 담론 보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는 것 아닌가요? 서베이에서는 그렇게 나오긴 했지만 다른 신문에선 호주 워킹홀리데이 사례라거나, 다른 나라로 가는 걸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여기 사는 것. ‘한국이 싫어서’라는 아까 언급하신 그 작가의 소설도 있고. 혹시 이런 방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궁금해요.

A. 제가 말씀드렸던 게 뭐냐면, 공동체에 대한 희구라는 게, 사교적 차원에서 근린 공동체 범위라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런 점에서 수평적 연대에 대한 희구가, 공동체에 대한 범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과거처럼 넓은 범위로 확장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때는 국민공동체, 민족공동체라는 말이 크게 모순적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제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게 되죠. 지금 대한민국은 두 개의 민족으로 구성돼 있잖아요.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두 개의 네이션이 존재하는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면서 동시에 근린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게, 형용모순처럼 들릴 순 있지만, 심지어 한 사람의 개인적 내면 차원에서도 충분히 공존가능한 생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단위 자체가 다르기도 하고. 그리고 인간의 내면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잖아요. 자기 혼자 스스로 생각하면서, 아 나는 북유럽식 사민주의가 왔으면 좋겠네, 자기는 보수주의자라 생각하는데 알고 보니 북유럽 사민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더라, 그런 케이스들 있죠. 그런 걸 잘 밝혀내는 게 중요한 작업이란 생각이 듭니다.

Q. 처음 말씀하셨을 때 표적과 좌표가 사라졌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강의 쭉 들어보니까 무슨 말씀인지 해소가 되긴 했는데. 근데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새로운 표적과 좌표는 굳이 필요한지, 아닌 건지. 또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만들어낼 건지.

A.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네요. 표적 없이 인류가 문명질서를 만들어냈다라고 하는 걸 어떤 인류학 입문서에서도, 어떤 사회학 서적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항상 외부에 적이 있는 거죠. 이방인을 만들어내면서 사회가 형성이 되고. 무슨 공동체건, 공동체라는 게 그거잖아요, 과잠 입는 것도 자기들끼리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셈일 텐데, 그걸 가지는 순간에 다른 집단들에 대한 문화적 구별이 나타나는 것처럼. 외부의 표적이라고 하는 걸 잡아놓고 거기에 선을 긋고 선 안쪽의 존재들끼리 수평적 연대라는 게 가능해지는 셈이 되는데요. 그럼 이건 항상 문제가 다시 돌아오게 되죠. 누군가는 반드시 배제해야 하는 건가? 누군가는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건가? 이런 쟁점이 돌아오게 되는데.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봐요, 저는. 되게 나쁜 놈 같죠? (웃음)

다만 중요한 건 그거예요. 선을 잘 그어야 한다. 아까 수직적 적대를 이야기한 것도 사실 그런 맥락이 포함이 되는데. 선을 잘 그어야 하고, 한편으론 잘 긋되, 한번 그은 선이 영원불변한 것으로 생각해선 절대 안 됩니다. 우린 항상 선 긋기를 하고 살고 있는데, 이 선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 의심을 하고 오류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정정, 즉 계속해서 선을 다시 그어내는 작업들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표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대신 그 표적을 설정했을 때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 지금처럼 완전 오인, 오판에 가득해서 표적을 만들어내는 건 정말 큰 문제죠. 누구나 수긍 가능한 보편타당한 표적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은 다 맥락이 있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지금 상황은 아노미를 넘어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런 상태잖아요. 아노미적 자살이 문제가 아니라 아노미적 타살이 문제잖아요. 묻지마 살인, 그런 게 문제가 되고. 이런 맥락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외부의 가상의 적을 그어주는 게, 현재처럼 폭력적인 상황을, 완전 해소하긴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로서 필요하다고 봐요. 그게 뭐가 될 진 모르겠어요, 저도. 가급적이면 적대의 설정을 잘 끌어왔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아이디어고요.

그 다음에 좌표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거 같은데, 그럼 좌표를 어떻게 만들 거냐고 한다면, 이건 사람들이 계속 실험 중인 것 같아요. 완전히 조증에 빠진 사람은 세계시민으로 가요. 국민을 넘어 세계시민. 내셔널리즘으로 커버하기엔 세계화 추세가 거스를 수 없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한편으론 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힘도 굉장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으니까. 시티즌, 시민이라고 하는 문제설정을 하기도 하고. 마을 공동체 운동, 이런 것도 많이 하잖아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호명방식이 뭐냐면 ‘주민’으로 마을 사람들을 호명해내는 거예요. 우리는 같은 주민들입니다, 하면서. 그러면서 좌표를 설정한다고 하는 건, 이게 하나의 통치이념이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사람들을 엮어내고 결속시켜낼 수 있는 접착제죠. 사람들을 결속해 낼 수 있는 메커니즘,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근데 제3의 매개항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어떤 매개항도 없이 개별자와 개별자가 대등하게 만나서 수평적 연대를 실현시킨다? 둘 사이에선 관계가 가능할 텐데, 이게 3자 4자 5자가 끼기 시작하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상상하는 여러 방편 중 하나가 뭐냐면, 사교적 관계, 다른 한편으론 네트워크잖아요, 수평적 네트워크. 소셜 네트워크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람들이 정서적 안정감, 규범적 질서, 이런 걸 생각할 수 있나 하면 거의 불가능해 보이거든요. 오히려 그건 제가 봤을 때 허구적 장치에 가까워 보여요. 뒤르켐 식으로 얘기하면 집합 표상 같은 게 필요할 거고. 프로이트 식으로 얘기하자면, 카리스마적 지도자. 근데 그게 꼭 인물일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요. 이념이어도 된다고 해요. 어쨌든 제3의 매개항이 있을 때 사실은 집단의 동일성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죠. 매개항과 자기 자신의 거리, 그리고 매개항과 타인 사이의 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질 때 이 사람과 이 사람 사이에 동류의식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메커니즘은 이미 19세기 사상가들이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와가지고 학문적으로 들어가면 행동경제학이니 이런 게 나타나면서, 지금같이 사람들이 관계형성을 하거나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할 때 매개 없이 가능한 것처럼 상상하죠. 좀 그래요, 씁쓸한 형국인데, 어쨌든 집합표상에 준하는 제3의 매개항을 설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뭐가 될 진 모르겠는데, 사실 지금은 다 실패하고 있는 거죠. 과거 국민처럼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는 게 필요한데, 그렇다고 과거의 국민 호명 메커니즘으로 돌아갈 순 없고. 왜냐하면 이젠 이걸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거고, 그리로 돌아간다면 폭력의 기억만 자극하는 걸 테니까. 다른 게 필요한데 그게 뭘까, 그게 뭘까요. 정치철학 하는 사람들은 ‘시민’이라고 하는 표상에 굉장히 동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사람들한테 동질감 같은 걸 얼마나 제공할 수 있을 진 의문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